저녁을 먹고 나면 자연스럽게 운동화를 신게 되는 길이 있다. 집 근처 West Irvine Trail이다. 처음엔 그냥 동네에 산책로가 하나 있구나 했는데, 살다 보니 이 길이 우리 동네 생활의 중심이라는 걸 알게 됐다. 얼바인으로 이사 오거나 이 동네를 알아보는 분들에게 한 번쯤 걸어보라고 권하고 싶어서 적어둔다.
자전거도 사람도 같이 다니는 길
이 길의 가장 좋은 점은 자전거 도로와 산책로가 나란히 붙어 있다는 거다. 그래서 자전거 타는 사람, 조깅하는 사람, 천천히 걷는 사람이 서로 부딪히지 않고 각자 속도로 다닌다. 길도 한참 길게 이어져 있어서, 그날 컨디션에 따라 짧게 돌고 올 수도 있고 마음먹고 길게 걸을 수도 있다. 정해진 코스가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만큼 걷는 길이라 부담이 없다.

여름에도 그늘이 있는 길
남가주가 덥다고 해도 이 길은 양옆으로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어서 그늘이 제법 진다. 한여름 낮에도 나무 아래로 걸으면 생각보다 견딜 만하다. 해 질 무렵이면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면서 길이 또 다른 분위기가 되는데, 그 시간에 걷는 걸 제일 좋아한다.
저녁이면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아파트 단지마다 트레일로 바로 나오는 연결문이 있다. 그래서 저녁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그 문으로 하나둘 나와 산책을 한다.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사람, 유모차를 미는 부부, 운동 삼아 빠르게 걷는 사람까지. 아침에도 조깅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길이 동네 사람들의 일상에 얼마나 깊이 들어와 있는지 걷다 보면 느껴진다.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또 하나 좋은 점은, 이 길을 따라 내려가면 벡맨 하이스쿨(Beckman High School) 근처로 이어진다는 거다. 차도를 건너지 않고 트레일로 통학할 수 있어서 아이들이 다니기에 안전하다. 벡맨은 터스틴 학군에 속한 학교라 이 동네에서 학교를 보고 들어오는 집도 많다.
길 끝에서 만나는 뜻밖의 역사
이 길을 반대로, 쭉 올라가다 보면 성당이 나오고 조금 더 가면 도서관이 하나 보인다. Irvine Public Library의 Katie Wheeler 분관인데, 처음 봤을 땐 그냥 예쁜 옛날식 건물이구나 했다. 알고 보니 이 건물은 단순한 도서관이 아니었다.
이곳은 얼바인이라는 도시의 뿌리가 된 어바인(Irvine) 가문이 살던 저택을 복원한 건물이다. 원래 저택은 1876년에 지어졌는데 1965년 화재로 사라졌고, 그 자리에 원래 모습 그대로 다시 지어 2008년 도서관으로 문을 열었다. 그래서 빅토리아풍의 고풍스러운 외관을 하고 있고, Irvine Ranch Historic Park라는 역사 공원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매일 걷던 산책로 끝에 이런 사연이 숨어 있다는 걸 알고 나니, 그 앞을 지날 때마다 한 번씩 더 보게 된다.
도서관을 지나면 길 건너로 Tustin Ranch Sports Park가 보인다. 운동장과 공원이 있어서 주말이면 아이들 경기로 북적이는 곳이다.

일 년 내내 걷기 좋은 동네
얼바인에 살면서 가장 좋은 점을 하나 꼽으라면 이런 거다. 이 사진도 한여름에 산책하다 찍은 건데, 이렇게 동네 곳곳에 부겐빌레아가 흐드러지게 핀다. 날씨가 일 년 내내 온화하고 비 오는 날도 드물어서, 거창한 여행지가 아니어도 동네 산책로를 걷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날이 많다.
걷기 전에 참고하면 좋은 것
위치: West Irvine / 터스틴 랜치 일대, 아파트 단지마다 트레일 연결문 있음
노면: 포장된 길, 자전거 도로와 산책로 분리 — 유모차·자전거 모두 편함
그늘: 큰 나무가 많아 여름에도 그늘 구간이 있지만, 한낮엔 물·모자 권장
코스: 한쪽은 벡맨 하이스쿨 방향, 반대쪽은 성당·Katie Wheeler 도서관·Tustin Ranch Sports Park 방향
추천 시간: 해 질 무렵 가로등이 켜질 때, 또는 이른 아침 조깅
특별한 준비 없이 운동화만 신고 나서면 되는 길이다. 동네에 이런 산책로가 있다는 게 얼바인 생활의 작지만 큰 즐거움이다.


